“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다.”
8월 24일 새벽, 고진영(24, 하이트진로)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CP위민스오픈에서 시즌 4승을 올리는 순간을 지켜보면서 골프팬들이 쏟아낸 반응이다. 물론 고진영이 잘하는 선수는 분명하지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 정도로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LPGA 투어에서의 고진영은 존재감의 체급이 달라졌다. 마치 한국에서의 투어는 기반을 닦는 과정이었을 뿐이고, LPGA 투어에서 꽃을 피우기로 작정한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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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초, 고진영은 또 하나의 메이저 대회인 AIG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 3위를 했다. 이 대회 종료 후 고진영은 의미 있는 상 하나를 확보했다. 매 시즌 메이저 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올린 선수에게 주는 ‘롤렉스 아니카 메이저 어워드’다. 올해 메이저대회에서 고진영보다 더 나은 성적을 올릴 선수는 없기 때문에 이 상의 수상자로 고진영이 확정됐다.
우리나라에서 뛸 때의 고진영을 돌아보자. 2014년부터 정규 투어에 뛰어들어 2017 시즌까지 99개 대회를 뛴 고진영은 모두 9차례 우승했다. 그런데 LPGA에서는 2018, 2019 두 시즌을 뛰었을 뿐이지만 6승을 올렸다. 이 마저도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KLPGA가 기반을 닦는 시간이었을 뿐이라는 말이 과장된 게 아니다.
여왕의 껌
치밀하고 냉철하지 않으면 내기 어려운 성과다. 최근 고진영의 경기를 보고 있으면 2가지 경기 외적인 모습이 눈에 띈다. 껌과 태극 문양이 박힌 수첩(야디지북)이다. 긴장이 고조될 시점에 껌을 씹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홀과 그린 상황을 메모하는 수첩에는 하얀 바탕에 태극문양이 선명하다.
에비앙챔피언십 최종라운드 12번홀에서 고진영은 보기를 했다. 낭패감이 고진영의 정신력을 지배할 수 있는 상황. 옆에 있던 캐디로부터 껌을 받아서 씹기 시작했다. 최종라운드가 주는 스트레스를 풀고, 좀더 경기에 집중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후 고진영은 2개의 버디를 더 추가해 시즌 2번째 메이저 우승을 일굴 수 있었다.
여왕의 수첩
태극 문양 수첩은 그녀의 방송 인터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고진영은 늘 “현장은 물론, 중계를 지켜본 팬들의 응원이 있어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어려운 경제상황과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는 국민들의 사정을 알고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다는 뜻이다.
KLPGA 투어에서의 경험이 기술적인 바탕을 다졌다면, 껌과 태극 수첩은 정신력을 가다듬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 더해 독실한 신앙생활은 정신력의 또 다른 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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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승 부문에서는 고진영이 가장 먼저 4승 고지를 밟았고, 경쟁자들은 아직 ‘시즌 2승’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박성현과 김세영, 그리고 캐나다의 브룩 헨더슨이 2승씩을 올리고 있다.
상금 부문에서는 고진영이 26일 현재 261만 8631달러(약 31억 8,000만 원)를 벌었다. 2위는 우리나라의 이정은이다. 이정은은 상금 규모가 큰 US여자오픈 우승으로 큰 몫을 챙겼다. 186만 1,132만 달러로 고진영과 100만 달러 가까이 차이가 난다.
선수들의 자존심이 걸린 평균 타수상에서는 고진영이 68.81타로 1위, 우리나라의 김효주가 69.27타로 2위를 달리고 있다.
최고의 영예인 올해의 선수상 부문에서도 고진영이 237점으로 선두를, 이정은이 118점으로 2위를 달리고 있다. 올해의 선수상과 상금왕 부문은 사실상 적수가 없어 타이틀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진영이 ‘올해의 선수상’을 타게 되면 고진영은 또 하나의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신인상을 탄 그 이듬해 올해의 선수상까지 받는 선수가 LPGA 투어 역사에 몇 없다. 1979년 낸시 로페즈(미국), 1980년 베스 대니얼(미국), 1995년 애니카 소렌스탐(스웨덴), 2015년 리디아 고(뉴질랜드)가 있을 뿐이다.
고진영은 지난해 LPGA 역사상 67년 만에 신인 신분으로 시즌 개막전 우승자가 됐고, 여세를 몰아 신인왕까지 올랐다. 역대 5번째 ‘신인왕-올해의 선수상’ 연속 수상자의 탄생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잠시 머물렀다가 자리를 물려주는 세계 랭킹 1위가 아니라 한 시대를 주름잡는 제왕의 대관식이 머지않아 보인다.
/글=강희수 기자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