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타이거즈의 내야수 박찬호는 서울의 리틀야구단 출신이다. 대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대구구장을 자주 찾았다. 삼성을 응원했다. 이때부터 야구가 좋았다. 어릴 때 서울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은 간판 제작업을 했다. 유복한 생활은 아니었다. 부모님을 졸라 초등학교 4학년 때 리틀야구단에 들어가 야구를 시작했다. 달리는 것도 치는 것도 좋았지만, 볼을 잡는 수비가 너무 좋았다.
왜소한 체구, 초라한 출발
어떤 타구도 박찬호의 앞에서는 얌전해졌다. 건대부중과 장충고를 거치면서 수비 하나는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다. 원래는 동국대 진학을 앞뒀으나, 고민 끝에 프로를 택했다. 그는 “우리 집 형편이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아버지만 일을 하셨다. 간판업은 경기에 따라 기복이 심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짐을 덜어주고자 프로를 택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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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부임한 김기태 전 감독도 “찬호야! 많이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당시는 김선빈과 안치홍의 입대로 내야 자원이 없었다. 수비력은 쓸만했으니 2015시즌과 2016년 모두 69경기씩 출장했다. 3년 동안 169경기에서 타율 1할6푼9리, 장타율 2할9리, 출루율 2할2푼의 초라한 기록이었다.
박찬호는 “내가 너무 작았다. 공이 따라갈 수 있는 힘도 없었다. 공을 맞혀도 제대로 뻗지 않았다.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그때는 너무 부족했다. 정신적으로도 굉장히 어렸다. 수비는 정말 잘한다고 자부했지만 마무리 캠프에서 김선빈 선배의 수비를 보고 충격을 먹었다.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했다”며 웃었다.
몸과 마음의 재충전, 현역 복무
2016시즌을 마치자 김선빈이 복귀를 했고 입대를 결정했다. 김기태 감독도 “기본적으로 수비도 좋고 센스가 있다. 군에 가서 몸을 많이 키우고 나면 훨씬 좋아질 것이다”며 입대를 권유했다. 1군 실적이 없어 상무 혹은 경찰청이 아닌 현역이었다. 청와대를 지키는 경비단에서 군복무를 했다. 야구선수들이 아닌 일반인들과 처음으로 먹고 자는 생활, 몸과 마음이 훌쩍 커지는 시간이었다.
박찬호는 “군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야구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다 전혀 다른 세상에 살던 친구들, 여러 환경 자라온 친구들과 지냈다. 생각하는 것도 달랐다. 그들과 생활하면서 행복할 줄 알아야 되겠다고 느꼈다. 꿈도 목표도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야구 하나만 보고 살아온 내가 행복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규칙적인 생활에 먹는 것도 충실했다. 일부러 살을 찌우려 햄을 밥 먹듯이 구겨 넣었다. 제대하니 10kg 이상 불었다. 박찬호는 “살이 찌니 힘이 붙고 스피드가 생겼다. 달리기도 빨라졌고 순발력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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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는 “그때 2군에서 굉장히 타격감이 좋았다. 내가 원하는 타구도 나오고 괜찮다고 느끼는 차에 1군에 콜업됐다. 아직은 빠르다고 느꼈지만, 팀 상황을 보니 내가 잘해도 못해도 일단 열흘은 무조건 주전 유격수로 나가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 마음먹고 독하게 했다”고 말했다. 당시 김선빈의 자리 뿐만 아니라 이범호의 3루 자리도 주인이 없었다.
몸도 마음도 강해진 박찬호는 공수주에서 펄펄 날았다. 타율 3할을 넘겼고 도루도 곧잘 성공했다. 유격수와 3루수에 2루수까지 넘나 들면서 철벽 수비력을 과시했다. 김선빈이 복귀하자 3루로 옮겼고 어느새 주전 자리를 꿰찼다.
“공수주 삼박자에 야구센스까지 갖췄다”는 호평이 나왔다. 팬들의 눈을 단번에 사로 잡았고 언론에서도 새로운 스타의 등장에 주목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1주일, 2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됐고 지금까지 주전을 지키고 있다. 급기야 대선배 이범호는 은퇴식에서 자신의 배번을 물려줄 후배로 박찬호를 지명했고 2만 명의 관중들 앞에서 멋진 배번 승계식까지 했다.
박찬호는 “워낙 존경하는 선배이고 은퇴식을 좀 더 의미있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남은 인생에서 굉장히 의미 있고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내 야구에서 길잡이와 목표가 될 수 있다”고 감격했다.
도루 타이틀, 꿈은 이뤄질까
그는 요즘말로 ‘갑툭튀’ 도루왕이다. 도루 1위에 이름을 올렸고 생애 첫 타이틀에 도전하는 위치까지 우뚝 섰다. 도루의 비결은 ‘분석과 과감성’이었다.
김종국 주루코치와 매일 경기 전 영상을 보며 상대 투수를 연구한다. 그는 “코치님이 거의 도루를 만들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운 대로 했다. 대신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가서 슬라이딩을 한다. 이 때문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웃었다.
김종국 코치는 “도루 타이밍을 기막히게 잘 잡고 과감성이 뛰어나다. 도루 능력이 있어도 과감하지 않으면 성공 못한다. 찬호는 스타트가 좋아 발이 빠르지 않아도 성공률이 높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수비력도 리그의 톱 클래스로 인정을 받았다. 타구에 대한 판단이 빠르고 수비 폭이 넓다. 발에 비해 몸의 순발력이 대단히 좋다. 타구의 바운드에 관계없이 포구에 본능적인 감각을 타고 났다. 화려한 플레이를 좋아하고 멋을 낸다. 그래서 조금은 차분한 수비를 하라는 주문을 받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비가 좋아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영상도 많이 찾아보고 따라 했다. 어릴 때는 박진만 코치님(삼성)을 보면서 많이 배웠다. 대신 틀에 박힌 것이 싫어 나만의 것도 만들었다. 대개 공을 잡으면 가슴으로 끌어올리는데 난 바로 잡아 던지는 것이 좋았다”라고 설명했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면서 체력이 바닥을 쳤다. 동시에 타율과 출루율도 떨어졌다. 풀타임 첫 해가 주는 아픔이었다. 뭣 모르고 열심히 치고 달리고 도루를 시도하다 보니 체력이 남아날 수 없었다. 3할을 넘던 타율이 8월 중순에는 2할 6푼대까지 하락했다.
남은 시즌 목표는 도루왕과 타율 끌어올리기.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적 유지가 목표였다. 이제는 너무 타율이 떨어져 다시 올라가야 한다. 솔직히 도루 1위를 하고 싶은데 김하성(키움)이 타이틀 욕심이 있는 것 같다. 하성이는 맘먹고 뛰면 내가 안될 수 있다. 출루를 워낙 잘한다”며 도루왕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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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후 박찬호의 모습을 어떨까? 그는 “2029년이니, 일단 FA를 하고(웃음) 주장을 맡아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 팀이 많이 변했으면 좋겠다. 강하고 신나게 야구하는 활발한 팀으로 만들고 싶다. 어린 선수들이 기량을 펼쳐주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 내가 누군가의 꿈이 되는 것이다. 나를 배우고 싶은 선수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계획을 밝혔다.
그에게 “야구가 무엇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을 했다. 박찬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냥 밥이자 공기이다. 올해까지 16년째 야구를 하고 있다. 미워도 좋아도 뗄 수 없는 애증의 관계다. 지금은 정말 야구 꼴도 보기 싫다. 야구 안되니까. 그러나 이것도 과정이고 넘어서야 한다”는 말을 하며 웃었다. 천상 야구에 울고 웃는 선수였다.
/글=이선호 기자 sunny@osen.co.kr, 사진=박준형 기자 soul102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