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일 이정은(23, 대방건설)이 미국의 내셔널타이틀 대회인 ‘제 74회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다. 총상금이 550만 달러(약 65억 원)에 우승상금만 100a만 달러(약 11억 원)에 이르는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 메이저 대회다. LPGA 투어에서 뛰고 있는 선수라면 누구라도 갖고 싶어 하는 타이틀이다.
그런데 이정은은 대회 우승 전부터 이슈를 몰고 다녔다. 바로 그녀 이름 뒤에 붙은 ‘6’이라는 숫자 때문이다.
타이거 우즈의 스윙코치이기도 했던 유명 골프코치 행크 헤이니가 US여자오픈을 앞두고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이번 대회에서도 한국 선수가 우승할 것으로 예언하겠다. 정확히 이름은 댈 수 없지만 리(Lee)라고하는 이름이 한 무더기 있다”고 말했다. 헤이니의 신중하지 못한 발언은 즉각 인종차별 논란으로 번졌고 헤이니가 사과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한국 선수, 또는 한국계 선수 중에 이 씨 성을 가진 선수가 많기 때문에 촉발된 이슈이기도 했지만, 이정은의 이름 뒤에 붙는 숫자 ‘6’이 그들의 눈길을 끈 측면도 있다. 다분히 시샘이 섞인 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 발음하기도 어려운 한국 선수들의 이름이 LPGA 투어를 휩쓸고 있는 현실이 못마땅했을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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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의 US오픈 우승은 기록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남겼다.
이정은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10번째 한국 선수가 됐다. 1998년 ‘맨발 투혼’으로 우승한 박세리를 시작으로, 김주연(2005), 박인비(2008·2013), 지은희(2009), 유소연(2011), 최나연(2012), 전인지(2015), 박성현(2017)이 모두 US여자오픈에서 우승컵을 번쩍 들어올렸다. 박인비는 2차례나 이 대회에서 우승했다.
박세리 이후 한국 선수가 US여자오픈에서 유독 강하다는 말도 충분히 나올 만하다. 22년 동안 10번을 우승했으니 무려 45%의 확률이다. 더 놀라운 기록도 있다. US여자오픈에서 LPGA 투어 생애 첫 우승을 한 한국 선수가 이정은까지 6명이나 된다. 김주연 박인비 유소연 전인지 박성현 이정은이 모두 LPGA 투어 첫 우승을 미국 내셔널타이틀 대회에서 올렸다.
미국 골프계가 시샘할 일은 이게 다가 아니다. LPGA 투어 신인왕 싹쓸이 사건이다. 한국 여자 골퍼들은 지난 2015년부터 LPGA 투어 신인왕을 독식하고 있다. 2015년 김세영을 시작으로, 2016년 전인지, 2017년 박성현, 2018년 고진영이 잇달아 신인왕 타이틀을 받아갔다. 2019 시즌은 어떨까? 6월 24일 끝난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을 기준으로 봤을 때 신인왕 경쟁은 889점을 확보한 이정은이 단연 독보적이다. 2위 크리스틴 길먼을 2배 이상의 포인트로 따돌리고 있다. 이정은은 상금왕 레이스에서도 155만 달러로 1위를 달리고 있다. 그 뒤는 123만 달러의 고진영이 따르고 있다. 좀 이른 시점이긴 하지만 2019 시즌 신인왕도 이정은이 따논 당상이다.
LPGA 투어 세계 랭킹도 한국 선수들이 번갈아 가면서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여제 박인비를 위시해 박성현, 고진영이 번갈아 가면서 세계 톱 랭커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이정은까지 가세하면서 LPGA는 ‘한국 여인천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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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PGA 투어에서 정상에 오르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시즌 신인왕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 해 이정은은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 사실을 내내 원통해 한 이정은은 이듬해부터 위세를 떨치기 시작해 2017년 다승왕, 상금왕, 대상까지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2018년에는 2년 연속 상금왕 타이틀을 차지하며 KLPGA 정상에 굳건히 자리를 틀었다. 기초 과정을 건너 뛴 적이 없는 이정은은 이미 좌절과 영광을 다 겪은 백전노장처럼 매 상황에서 침착했다.
주어진 환경을 긍정적 요인으로 전환시키는 능력도 뛰어나다. 이정은의 이름 뒤에 붙은 숫자 ‘6’은 KLPGA 입회시 동명이인에게 매기는 순서이다. 이정은이라는 이름이 흔하다보니 KLPGA에는 이미 같은 이름이 5명이나 있고, 여섯 번째 이정은이라는 뜻의 ‘이정은6’가 됐다.
타고난 이름에 엉뚱하게 숫자를 붙여 부르는 게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정은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식스’를 행운의 숫자라며 즐겼다. ‘핫식스’라는 별명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US여자오픈 우승 인터뷰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나에게 6은 행운의 숫자인 것 같다. 오늘도 6언더파로 우승했고, 한국에서 첫 우승할 때도 3라운드에서 66타를 쳤다. ‘이정은 식스’라고 불리는 게 나쁘지 않다”고 말이다. 이정은의 공에는 ‘6’이라는 숫자가 오늘도 빙글빙글 돌아간다.
/글=강희수 기자 100c@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