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코미디, 이 공식을 깨고 흥행 가속도를 높인 작품이 여기 있다. 사실 개봉 전부터 이름값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지만 뚜껑을 여니 기대 이상이다. 지난 1월 22일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 믿고 보는 배우 이병헌이 있다.
‘내부자들’ 우민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제2의 권력자라 불리던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사건을 벌이기 전 40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중요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개봉 전부터 사전 예매량 10만 장을 돌파하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이병헌은 2인자로 불리며 언제나 박통(이성민 분) 곁을 지켰지만 옛 동료이자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 분)이 박통 정권의 실체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서기 시작하며 고민에 빠지는 인물 김규평을 연기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한 실존인물 김재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 등 쟁쟁한 배우들이 총출동하지만 김규평으로 완벽하게 분한 이병헌의 존재감은 단연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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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남산의 부장들’을 본 소감은?
▲기술 시사회 때 처음 봤다. 우민호 감독이 다 와서 봤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웰메이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긴 시간 후반 작업이 있으니까 영화가 잘 나온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참여한 배우로서 객관성을 잃기 때문에 이 영화가 어떻다고 얘기하기 그렇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영화가 완성도 높고 배우들 연기가 너무 좋다는 거다. 나도 늘 몸부림치면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내부자들’ 때엔 캐릭터가 뚜렷했는데,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연기를 최소화한 느낌이다.
▲물론 터질 때 터지지만 답답할 만큼 계속 누르고 자제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걸 표현하는 건 배우들에게 큰 어려움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 근현대사의 가장 큰 사건이었고, 실존했던 인물인데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들을 더하는 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에 있는 그대로 그 안에서만 내가 최선을 다해 내 감정을 연기했다.
-실존인물 연기가 처음은 아닌데?
▲근현대사의 실존 인물은 처음이다. 기존의 ‘남한산성’이나 ‘광해-왕이 된 남자’ 속 역사적인 인물들은 먼 옛날인데 이건 근현대사다. 여전히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에 자칫 우리 영화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역사적으로 여전히 미스터리한 부분을 규정 지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도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다. 그렇다 보니 어느 촬영보다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실존인물인 김재규(극중 김규평)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린다. 작품을 선택할 때 고민하진 않았나?
▲작품 선택에서 부담감은 있었지만 사실 영화를 선택할 때 이야기를 먼저 보고 그 다음에 내가 연기할 캐릭터를 본다. 이번에는 이런 감정을 연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섬세한 심리를, 그리고 인물간의 갈등을. 드라마틱하게 보이니 매력을 느꼈다.
-극중 김규평을 어떻게 이해하면서 연기했나?
▲기본적으로는 시나리오 그 안에서 놀자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생각은 안 하고 시나리오에서 그려진 대로 그 안에서만 최선을 다했다.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논쟁거리가 되고 이야기 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규평 역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대의적인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복잡한 마음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희준, 이성민은 실존인물과 싱크로율을 높였는데, 김규평은 그렇지 않다.
▲그 부분은 감독님과 카메라 테스트 하기 전에 이야기를 많이 했다. 심지어 목소리와 말투도 내가 싱크로율을 맞추는 게 좋을까, 그냥 그대로 하는 게 좋을까 고민했다. 이름도 사실과 다르지 않나. 결론적으로 굳이 똑같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몇 가지 부분, 이를 테면 헤어스타일과 안경 같은 부분만 참고하자고 했다.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 보이더라. 일부러 체중 감량을 한 건가?
▲아니다. 오히려 살찌면 살찐대로 두기로 했다. 일부러 감량하진 않았다. 오히려 다른 때보다 몸무게가 더 나갔을 거다. 배우로서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살이 잘 안 찐다 하하.
-25kg을 증량한 곽실장 역의 이희준은 어땠나?
▲이 영화는 캐릭터들이 다 굉장히 심각하고 진지하고 긴장감 넘친다. 그나마 곽실장 캐릭터가 그 안에서 실소를 자아낸다. 살이 그렇게 찌니까 발성도 평소와 다르게 느껴지더라. 연기와 목소리 톤을 변화주려고 했는지 몰라도. 우리는 이희준을 잘 아니까 촬영하면서 웃겼던 점도 많다. 헬기가 뜨기 전에 뛰어가는 장면은 너무 웃겼다. 그렇게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재밌더라. 하도 소리를 지르면서 하니까 숨 넘어가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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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된 이병헌의 얼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김규평의 심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눈빛과 숨소리, 표정의 작은 변화, 묵직한 음성으로 전해지는 연기의 깊이가 영화 내내 관객들을 소름 돋게 만든다. 눈빛으로 말하는 배우답게 인물의 심리 변화를 탁월하게 연기한 그다. 어려운 연기를 다시 한번 이병헌이 해냈다.
-숨도 아끼는 것처럼 연기하던데 터뜨리는 연기보다 스트레스 받지 않을까?
▲대사를 몇 마디 안 하고 절제할 때엔 조용조용 내뱉는 대사 속에 디테일한 감정들이 다 전달돼야 하니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런데 그 지점이 김규평 캐릭터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끝나는 게 아니고 결국 터뜨리는 부분도 있다. 먼 옛날 이야기도 아니고 근현대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 아는 건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겉으로만 알고 있는 사건에 깊숙하게 들어가서 그 감정의 결들을 세심하게 보여주는 거다. 이 때문에 어떤 영화보다도 섬세한 연기, 심리묘사가 필요하다고 봤다.
-유독 클로즈업이 많았는데, 표정의 변화를 계산해서 연기했나? 아니면 자연럽게 인물에 이입했나?
▲클로즈업이 많은 작품에서는 내가 뭔가를 보여주려고 할 때 거부감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실제랑 다르다. 직접 사람을 만나 봐도 그 사람의 감정을 못 읽을 때가 있는데, 정말 극단적인 클로즈업은 기분만 갖고 있어도 관객들에게 전달될 때가 많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배우들이 느끼는 신기한 마술 같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 감정과 그 기분을 가지려고 애쓰면 극단적인 클로즈업에서 충분히 관객에게 다 전달될 거라는 믿음으로 연기했다.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면 관객들이 느끼는 거부감이 클 테니.
-늘 1인자였는데 2인자의 마음이 이해가 됐나.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다(웃음). 그렇게 살면 굉장히 숨막힐 것 같다. 그런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첫 번째 두 번째 나누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숨막히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렇게 되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본인은 캐릭터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나?
▲그 인물과 겉으로 보여지는 외모의 싱크로율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 인물이 가진 감정 상태와 심리 등은 최대한 닮으려고 애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나 다큐멘터리, 실제 영상들, 그리고 여기 저기서 들은 증언들 모두 도움이 됐다. 내가 실제 그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내면적인 심리 상태나 감정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외적으로는 박통을 연기한 이성민 배우의 싱크로율이 높았는데.
▲이성민 배우와 연기하기 전에 집무실에서 처음 그를 그린 그림을 봤다. 정말 누구인지 몰랐다. 실존 인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이성민 배우더라. 그 그림을 보고 ‘헉’ 했다. ‘우와’ 어떻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실제로 촬영장에서 처음 봤을 때도 놀라웠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도움이 됐을 거라 생각한다. 2인자 역할을 연기한 사람으로서 분명 도움이 됐다.
-곽도원은 ‘이병헌을 가장 완벽한 형태의 배우’라고 표현했는데, 스스로 평가하자면?
▲나는 그 말이 개그처럼 들렸다. 곽도원 배우가 극찬을 잘하는 것 같다(웃음). 물론 너무 고마웠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낯 뜨거워졌지만 칭찬을 해줘서 너무 감사했다. 칭찬에 후한 배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기분은 참 좋았다 하하. 그렇지만 어떤 게 정말 완벽한 형태의 배우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배우로서 본인의 가장 큰 장점은?
▲신인 때 방송국 드라마로 처음 시작했는데 조명 감독님이 ‘얼굴이 까다롭다’고 하시더라. 조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까다롭다고 심지어 짜증내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영화를 찍을 때 감독님들 중 몇 분이 그런 칭찬을 해주셨다. 얼굴이 각도에 따라서 다양한 분위기를 낸다고. 골격의 문제인 것 같다. 처음엔 욕하는 줄 알고 긴장했었는데 하하. 그런 점은 배우로서 축복 받은 것 같다.
-이병헌은 ‘믿고 보는’ 몇 안 되는 배우다. 혹시 부담이 되나?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되게 기분 좋은 칭찬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배우가 어떤 작품을 새로 찍는다는 말에 ‘기대하고 보러 가야지’ 하는 건 배우로서 고맙고 감사하고 축복 받은 일이다. 그래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냐고 하면, 여전히 어떤 작품을 한다고 했을 때 ‘나중에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배우라고 한다. 나를 계속 성장시킨다는 것이 제일 어려운 거라고 본다. 그리고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글= 선미경 기자 seon@osen.co.kr, 박소영 기자 comet568@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