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수술만 여덟 번’, 시련 딛고 우뚝 선 엄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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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천호는 2016년 쇼트트랙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했다. 쇼트트랙서 못다핀 꽃이 종목 전향 2년 만에 만개했다.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나선 2018-201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서 남자 매스스타트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엄천호는 “쇼트트랙 대표팀 이후 8년 만에 대표로 선발됐다. 노력이라고 하면 노력, 운이라고 하면 운일 테지만 결국 국가대표가 됐다”며 미소를 지었다.

엄천호는 월드컵 1차 대회서 동메달을 딴 뒤 2차 대회 은메달로 한 걸음 도약했다. 4차 대회서 기어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가대표 데뷔 시즌에 모든 것을 이뤘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엔 걱정이 많았다. 국가대표가 된 것에 만족하고 경험을 쌓자는 생각이었다. 대회를 하면서 메달을 따고 하나씩 하나씩 하다 보니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세계 빙속 장거리의 벽이 높아 성적은 기대 안했지만 메달을 따며 자신감이 붙었다. 큰 행운이었다.”

엄천호는 올해 2월 펼쳐진 2019 ISU 스피드스케이팅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 매스스타트서 은메달을 차지하며 세계 정상급 기량을 재확인했다. 그는 “‘세계선수권에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 했는데 진짜로 출전하게 돼 큰 경험이었다. 세계적인 선수들과 경기하는 거 자체가 영광이었고 꿈 같았다. 은메달을 획득해서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OSEN DB.
오뚝이 엄천호를 만든 근성

엄천호의 빙판 인생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오뚝이’다. 오른쪽 5번, 왼쪽 3번, 발목 수술만 총 8번이나 받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발목을 크게 다쳤을 때 의사 선생님이 상태를 보고 선수 생활 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첫 수술 뒤 재활을 거쳐 복귀했지만 넘어지면 운 나쁘게도 발목을 다쳤다. 골절은 물론 인대와 힘줄이 끊어진 적도 있었다.”

엄천호는 “첫 재활이 잘 된 게 다음에 다쳐도 다시 탈 수 있다는, 부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됐다. 내가 또 다치면 어떡하지 생각하지 않고 운동할 땐 오롯이 스케이팅에만 집중했다. 또 다친다는 생각은 안했다”면서 “스피드스케이팅은 운이 나쁘지 않으면 잘 다치지 않는다. 전향 뒤 처음으로 재활 없이 여름 훈련을 소화했다”고 했다. 발목 부상과 수술이 잦아지면서 힘든 시기도 있었다.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은 적도 있었다. 다치고 나서 재활하고 다시할 수 있을까 생각도 많이 했다. 내가 출전해보지 못한 올림픽이란 큰 꿈은 다시 운동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엄천호는 부상의 덫을 피해갈 수 없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도 전했다. “쇼트트랙 대표팀 이후 스피드스케이팅 대표 선발전서 계속 실패를 맛봤다. 좋은 선배님들이나 스승님들이 ‘포기하지만 말아라. 운동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전하고 있다’고 말해주셨다. 포기하지 않으니 보상을 받았다. 지난 시즌 한을 푸는 데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는 기간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 없다.”

한 번도 이겨내기 힘들었을 고통을 여덟 번이나 참아내며 소위 ‘멘털갑’이 됐다. 그만의 멘털 관리법도 특별하다. 한국체대 대학원 생으로 2년째 스포츠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그는 “오랜 기간 슬럼프를 겪으며 멘털이 약해졌지만 점점 좋아지고 있다”며 “’난 잃을 게 없어. 내가 지거나 못하면 어때’라고 생각하고 스타트 총성이 울리면 어느새 레이스에 집중하고 있다”고 호성적 비결을 밝혔다.

쇼트트랙 기대주서 빙속 강자로

쇼트트랙서 스피드스케이팅 전향한 건 신의 한 수가 됐다. 엄천호는 “매번 바뀌는 쇼트트랙의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 힘들었다. 부상도 있었다. 스포츠토토빙상단에 들어와서 이규혁 전 감독님이 전향을 권유해 마지막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전향했다”면서 “결정을 하는데 망설임은 없었다. 마지막 도전이자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설렜다”고 했다.

세계랭킹 1위에 오르고 금메달도 목에 걸었지만 엄천호는 아직도 스피드스케이팅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아직도 스피드스케이팅을 배우는 게 재미있다. 쇼트트랙은 몸상태, 스케이트날, 대진운 등 삼박자가 다 맞아야 결과가 나오지만 스피드스케이팅은 노력한 만큼 결과로 나온다. 못하면 내가 못한 거고 잘타면 내가 잘탄 거다. 준비 과정이나 경기 과정이나 마음이 편하다. 운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내 실력이 나오는 종목이라 재밌다. 아직도 배우고 있다.”

매스스타트는 스피드스케이팅의 쇼트트랙으로 불린다. 쇼트트랙 대표까지 지냈던 엄천호는 “쇼트트랙은 상대와 심리적인 경쟁도 해야 한다. 스피드스케이팅만 했던 선수보다 자리를 편하게 잡고 나가는 타이밍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코너링도 좋아 레이스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 엄천호는 여전히 발전을 꿈꾸고 있다. “코너링은 자신 있지만 직선 스케이팅을 보완해야 한다. 매스스타트뿐 아니라 5000m와 10000m도 등 다른 장거리 종목도 더 노력해서 발전하고 싶다.”

제2의 이승훈 아닌 제1의 엄천호로

이승훈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를 제패한 빙속 장거리 황제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0m 금메달과 5000m 은메달을 시작으로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팀추월 은메달,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매스스타트 금메달, 남자 팀추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엄천호에게도 존경의 대상이다. “승훈이 형이 밟아온 발자취를 따라간다는 건 말도 안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세계의 벽을 깬 승훈이 형을 존경한다. 난 잃을 것이 없는 선수다. 매 순간, 매 경기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올 것이다.”

5월 15일부터 비 시즌 훈련에 들어간 엄천호는 “새로운 시즌의 시작이다. 긴장도 되고 설레기도 한다”며 “10월 열리는 국가대표 선발전서 다시 뽑히는 게 1차 목표다. 지난 시즌 잘했지만 선발전서 잘해서 기세를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대표팀에 재선발되면 단점을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올림픽 금메달은 모든 빙상 선수들의 꿈이지만 엄천호의 소망은 조금 다르다. “올림픽 출전은 신이 점지해준다고 한다. 메달보다는 올림픽에 출전하는 게 목표다.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았기에 누가 갈지 모른다. 올림픽보다는 앞에 있는 시즌에 더 집중하면 올림픽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엄천호에겐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한국 빙상 역사상 최초로 쇼트트랙-빙속 두 종목 모두 아시안게임 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다. 엄천호는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 동계아시안게임서 쇼트트랙 대표로 출전해 남자 5000m 계주 금메달과 1500m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2021 동계 아시안게임서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서 메달을 추가하면 전무후무한 금자탑을 쌓는다. “아시안게임서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 메달을 모두 딴 한국 최초의 선수가 되고 싶다. 금메달이면 더 영광일 것 같다.” /이균재 기자 dolyng@osen.co.kr